크리스토퍼 놀란, 시간을 가지고 노는 남자
솔직히 말하면, 놀란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좀 당황스러웠다. 《메멘토》를 보고 나서 한참 동안 "뭐지?" 하면서 멍하니 앉아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며칠 뒤에도 그 영화가 계속 머릿속에 맴돌더라. 그때부터 알았다. 이 감독, 뭔가 다르구나. 혼란스러웠지만 이상하게 끌리는 무언가가 있었고, 바로 그게 놀란 영화의 매력이라는 걸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됐다.
📚 목차
놀란이 던지는 질문들
놀란 영화를 보면 항상 느끼는 게 있다. 이 사람은 관객을 편하게 놔두질 않는다는 것. 《인셉션》을 보면서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려하다 보면, 어느새 "내가 지금 꾸고 있는 꿈은 진짜 꿈일까?"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그는 복잡한 구조 속에서 단순한 감정을 끌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의 영화엔 철학이 깔려있긴 한데, 그렇다고 어려운 철학책 읽는 것처럼 지루하지는 않다. 오히려 액션과 스펙터클 속에서 자연스럽게 "기억이란 뭘까?", "시간이란 뭘까?" 같은 질문들이 떠오른다. 《인터스텔라》에서 쿠퍼가 딸을 위해 블랙홀로 뛰어들 때, 나도 모르게 울컥했던 건 단순히 감동적인 장면이어서가 아니라, 사랑과 시간에 대한 깊은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놀란은 서사를 통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을 따라가는 과정 자체를 영화의 재미로 만든다. 단순한 정답이 아닌 사유의 여지를 남겨두는 방식은 그만의 지적 연출 스타일로 자리 잡았다.
시간 놀이의 달인
놀란하면 뭐니뭐니해도 '시간'이다. 이 사람만큼 시간을 가지고 놀 줄 아는 감독이 또 있을까? 《테넷》은 솔직히 한 번 봐서는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장면들을 보면서 "이게 물리학적으로 가능한 건가?" 싶기도 하고,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경험을 했다.
그런데 이게 놀란의 묘미다. 복잡한 설정이지만 그냥 "아,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는 게 아니라, 정말로 그럴듯하게 만들어놓는다. 《인터스텔라》의 블랙홀 장면만 봐도 그렇다. 킵 손(Kip Thorne) 박사의 자문을 받아서 만들었다는데, 과학적으로도 그럴듯하면서 시각적으로도 압도적이었다.
IMAX로 보는 놀란 영화는 정말 다르다. CG 범벅인 요즘 영화들과는 달리, 실제로 촬영한 장면들이 주는 임팩트가 있다. 《다크 나이트》에서 트럭이 뒤집어지는 장면이나, 《인셉션》에서 복도가 회전하는 장면들을 보면 "진짜로 저렇게 찍었구나" 하는 감탄이 나온다. 관객이 영화 속 물리적 공간에 실제로 들어간 듯한 몰입을 유도한다.
영화계에 남긴 발자국
놀란이 영화계에 미친 영향은 생각보다 크다. 《다크 나이트》 이후로 슈퍼히어로 영화들이 좀 더 진지해졌다는 느낌이 든다. 단순히 선악구도가 아니라 복잡한 심리와 사회적 메시지를 담으려고 하는 시도들이 늘어났다. 그가 보여준 ‘블록버스터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증명은 많은 감독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또한 놀란은 넷플릭스나 스트리밍 중심의 흐름 속에서도 '극장에서 봐야 하는 영화'의 중요성을 꾸준히 외치고 있다. 《덩케르크》, 《테넷》, 《오펜하이머》 같은 작품들은 단순한 영상 콘텐츠가 아니라, 극장에서 온몸으로 경험하는 일종의 예술 설치작업과도 같다.
그는 필름 촬영과 실제 폭파 장면을 고집하는 방식으로 ‘현실에 기반한 서사’라는 개념을 더욱 공고히 했으며, 기술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놀란은 이제 하나의 장르처럼 인식되며, 그 이름만으로도 관객의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브랜드가 되었다.
매번 기대하게 되는 이유
놀란 영화의 매력은 한 번 보고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두 번째, 세 번째 볼 때마다 새로운 걸 발견하게 된다. 《프레스티지》를 처음 봤을 때는 그냥 마술사들의 대결 정도로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까 완전히 다른 영화더라. 영화 전체가 하나의 복선이자 트릭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때로는 너무 복잡해서 머리가 아플 때도 있다. 《테넷》 같은 경우는 아직도 완전히 이해했다고 자신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게 또 놀란 영화의 재미다. 영화 하나로 며칠 동안 생각할 거리를 준다는 것.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사고의 연장이 되는 영화가 바로 놀란 작품이다.
앞으로도 놀란이 어떤 새로운 시도를 할지 궁금하다. 시간과 기억, 현실과 꿈의 경계를 흐리는 그의 다음 작품이 벌써 기다려진다. 어차피 또 한 번에 이해 못할 거 같지만, 그래도 극장에서 볼 생각이다. 그게 놀란 영화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