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 변두리에서 찾은 진짜 이야기들 - 처음 만난 그의 영화
-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는 법 - 침묵의 힘
- 신인 배우들과의 작업 - 날것의 연기를 찾아서
- 변하지 않는 시선 - 고집스러운 독립정신
- 영화관을 나서며 -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기
얼마 전 홍대 앞 작은 독립영화관에서 최원섭 감독의 신작을 봤어요. 상영관엔 겨우 열 명 남짓 앉아 있었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런 묘한 여운이 있는 감독이에요.
최원섭이라는 이름이 대중에게 익숙하지 않은 건 어쩌면 당연해요. 그는 한 번도 스크린쿼터를 채우려 애쓰지 않았고, 투자 유치를 위해 스타 배우를 캐스팅한 적도 없어요. 오히려 그런 걸 의도적으로 피해온 것 같아요.
변두리에서 찾은 진짜 이야기들
처음 그의 영화를 접한 건 2018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였어요. <그림자 속의 거리>라는 작품이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첫 30분은 지루했어요. 아니, 지루하다기보다는... 불편했어요. 왜 이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걸까 싶었어요.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니 그 불편함의 정체를 알 수 있었어요. 우리가 일상에서 애써 외면하는 것들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불편함이었어요. 영화 속 가족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구조적 모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기도 했어요.
최원섭 감독의 영화엔 늘 '경계'에 있는 사람들이 나와요. 정규직이 되지 못한 40대, 재개발로 쫓겨나는 할머니, 알바로 연명하는 대학생... 이들은 뉴스에서나 통계로만 접하던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그의 카메라를 통해 보면 이들이 단순한 '사회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할머니이고, 누군가의 친구라는 걸 깨닫게 돼요.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는 법
<불안의 하루>를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주인공이 실직 통보를 받는 장면이었어요. 다른 영화라면 분노의 폭발이나 절망적인 대사로 점철했을 텐데,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날 뿐이에요.
그런데 그 침묵이 어떤 절규보다도 강렬했어요. 카메라는 그의 뒷모습을 따라가며 복도를 걷는 발걸음 소리만 들려줘요. 그 몇 분의 장면에서 저는 한국 사회의 고용 불안정, 중년 남성의 위기, 가부장제의 모순을 모두 느낄 수 있었어요.
최 감독의 영화엔 설명하는 대사가 거의 없어요. 대신 인물들의 표정, 손짓, 그리고 공간이 이야기를 해요. <숨겨진 시간의 끝>에서 남편을 잃은 여성이 빈 침대를 바라보는 장면은 단 한 마디 대사 없이도 상실의 무게를 고스란히 전달해요.
신인 배우들과의 작업
최원섭 감독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은 배우들이에요. 대부분 낯선 얼굴들인데, 이들의 연기는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날것 그대로의 진정성을 보여줘요.
사실 이건 제작비 때문이기도 하다고 들었어요. 유명 배우를 쓸 돈이 없어서 연극무대에서 활동하던 배우들이나 연기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과 작업한다고 해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이게 그의 영화만의 독특한 색깔을 만들어내요.
<그림자 속의 거리>의 주연을 맡은 김모씨(실명은 기억이 안 나요)는 실제로 비정규직 노동자였다고 해요. 그래서인지 직장에서의 위축된 모습이나 가족 앞에서의 무력감이 연기라고 느껴지지 않았어요.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그가 배우들과 작업하는 방식이에요. 지인에게 들은 얘기론, 최 감독은 촬영 전에 배우들과 몇 달간 워크숍을 한다고 해요. 대본을 외우는 게 아니라 인물의 삶을 이해하는 시간을 갖는 거래요. 그래서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마치 실제 존재하는 사람처럼 느껴져요.
한 번은 우연히 그의 촬영 현장을 지나친 적이 있는데, 정말 조용했어요. 대부분의 영화 촬영장과 달리 사람들이 크게 떠들거나 바쁘게 움직이지 않았어요. 마치 일상의 한 장면을 그대로 포착하려는 듯한 분위기였어요.
변하지 않는 시선
요즘 독립영화들도 점점 상업적으로 변해가고 있어요. 투자를 받기 위해 좀 더 자극적인 소재를 다루거나, 화제성을 위해 사회적 이슈를 표면적으로만 다루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최원섭은 여전히 자기 방식을 고수하고 있어요. 최근작들을 봐도 여전히 조용하고, 여전히 불편하고, 여전히 생각할 거리를 던져줘요. 어쩌면 이런 고집이 그를 더욱 주목받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의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해요.
🚶♂️ 영화관을 나서며
최원섭 감독의 영화를 보고 나면 일상이 조금 다르게 보여요.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편의점 알바생, 아파트 경비아저씨... 이들 모두가 각자의 이야기를 가진 존재라는 걸 새삼 깨닫게 돼요.
솔직히 그의 영화는 쉽지 않아요. 재미있다고 말하기도 어렵고, 누군가에게 추천하기도 망설여져요. "영화 하나 볼까요?"라고 가볍게 시작했다가는 영화관을 나서면서 무거운 침묵에 빠지게 될 테니까요. 하지만 그런 불편함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 아닐까요.
최근 몇 년간 독립영화계도 많이 변했어요. OTT 플랫폼들이 독립영화에 투자하기 시작했고, 젊은 감독들은 SNS를 통해 자신을 알리는 데 능숙해요. 하지만 최원섭은 여전히 묵묵히 자기 길을 걷고 있어요.
그의 다음 작품이 언제 나올지는 모르겠어요. 아마 또 작은 상영관에서, 몇 명 안 되는 관객들과 만나게 될 거예요. 하지만 그 적은 관객들은 분명 영화가 끝나고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거예요. 그게 최원섭 감독 영화의 힘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