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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아픔을 영화로 승화시킨 구로사와

by oncelife 2025. 6. 20.

목차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일본 근현대사와 함께한 거장의 길

최근에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들을 다시 보면서 깜짝 놀란 게, 이 사람이 정말 격동의 시대를 다 겪으면서 영화를 만들었구나 싶었습니다. 1910년생이니까 일제강점기, 2차 대전, 패전, 전후 복구까지... 거의 근현대사 교과서 그 자체를 살았던 감독이더라고요.

그래서 구로사와의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가 살았던 시대 배경을 알아야겠다 싶어서 정리해봤습니다.


왜 구로사와를 다시 봐야 할까?

구로사와 아키라(1910~1998)하면 보통 "일본의 거장 감독" 정도로만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은데, 사실 이 사람은 그냥 영화만 잘 만든 게 아닙니다. 20세기 일본이 겪은 모든 격변을 다 체험하면서, 그것을 영화로 기록한 산증인입니다.

특히 요즘 다시 구로사와가 주목받는 이유는, 그의 영화에 담긴 질문들이 지금도 너무 현실적이기 때문입니다. 권력의 부패, 개인과 집단의 갈등, 진실이 뭔지 모르겠는 혼란스러운 시대... 이런 주제들이 100년 전 얘기인데도 지금 뉴스 보는 것 같습니다.

제국주의 일본에서 시작된 영화 인생

구로사와는 1910년 도쿄에서 태어났는데, 이때가 일본이 한창 제국주의로 치달을 때였습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아시아를 침략하던 이상한 시대였습니다.

재미있는 건 구로사와 집안이 꽤 서구적이었다는 겁니다. 아버지가 군인 출신이면서도 서양 스포츠를 좋아했고, 구로사와 본인도 어려서부터 서양 그림, 소설, 영화에 빠져 살았습니다. 처음엔 화가가 되려고 했다가 1936년에 영화사에 들어갔는데, 이때부터 운명이 바뀐 겁니다.

1940년대 초반까지는 군국주의 시대라 영화도 전쟁 선전용으로 많이 만들어졌는데, 구로사와는 그런 직접적인 프로파간다보다는 인간의 내면을 파고드는 작품들에 집중했습니다. 1943년 「슌스케 이야기」로 감독 데뷔했는데, 벌써 그때부터 남다른 인간애가 느껴졌습니다.

패전 후 폭발한 창작력 - 라쇼몽부터 7인의 사무라이까지

1945년 일본이 패전하고 나서 구로사와의 진짜 전성기가 시작됩니다. 미군정 하에서 언론과 문화의 자유가 생기니까, 그동안 못했던 얘기들을 쏟아내기 시작한 겁니다.

1950년 「라쇼몽」을 처음 봤을 때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한 사건을 여러 사람이 다르게 증언하는데, 누구 말이 진실인지 끝까지 알 수 없습니다. 이게 단순히 추리물이 아니라 "진실이란 게 정말 존재하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전후 혼란기에 모든 가치가 무너진 일본 사회의 상황과 딱 맞아떨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1952년 「이키루」! 이 영화는 진짜 눈물 없이 볼 수 없습니다. 말기 암 선고를 받은 시청 공무원이 남은 생을 의미 있게 보내려고 노력하는 이야기인데, 당시 일본의 관료주의와 무기력한 사회 분위기를 너무 잘 그려냈습니다.

「7인의 사무라이」(1954)는 또 다른 차원이었습니다. 농민들을 도적떼로부터 지키려는 사무라이들 이야기인데, 표면적으로는 시대극이지만 실제로는 계급, 공동체, 정의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겨 있습니다. 3시간 반이라는 긴 러닝타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세계가 인정한 아시아 영화의 힘

구로사와가 정말 대단한 건, 일본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출발했지만 전 세계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겁니다.

「라쇼몽」이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을 때, 서구 영화계에선 정말 충격이었다고 합니다. 동양에서 이런 철학적이고 예술적인 영화가 나올 줄 몰랐던 겁니다. 이후 「요짐보」, 「쓰바키 산주로」 같은 작품들도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특히 재미있는 건 서양 감독들이 구로사와 영화를 리메이크하거나 오마주한 경우가 정말 많다는 겁니다. 세르지오 레오네의 「황야의 무법자」는 「요짐보」를 거의 그대로 베낀 수준이고, 조지 루카스는 「스타워즈」가 「숨은 요새의 세 악당」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했습니다.

스필버그, 스코세이지, 타란티노까지... 이 거장들이 모두 구로사와를 스승으로 여긴다고 하니까, 정말 "감독들의 감독"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지금도 유효한 구로사와의 메시지

80년 넘게 살면서 일본 근현대사의 모든 격변을 겪은 구로사와가 일관되게 추구한 건 결국 인간의 존엄성이었던 것 같습니다. 권력이 부패하고, 사회가 혼란스럽고, 개인이 무력감을 느끼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냈습니다.

요즘 세상을 보면 구로사와가 던진 질문들이 더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가짜뉴스가 넘쳐나는 시대에 「라쇼몽」의 진실에 대한 회의는 더욱 현재적이고, 개인의 무력감이 커지는 사회에서 「이키루」의 메시지는 더욱 절절합니다.

구로사와를 단순히 "옛날 일본 감독"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아깝습니다. 그의 영화는 시대를 초월한 인간에 대한 성찰이고, 지금도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