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음으로써 전하는 가장 강렬한 이야기
얼마 전 홍대 앞 작은 독립영화관에서 최원섭 감독의 신작을 봤다. 상영관엔 겨우 열 명 남짓 앉아 있었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가고 상영관 조명이 켜져서야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묘한 여운이 있는 감독이다.
최원섭이라는 이름이 대중에게 익숙하지 않은 건 어쩌면 당연하다. 그는 한 번도 스크린쿼터를 채우려 애쓰지 않았고, 투자 유치를 위해 스타 배우를 캐스팅한 적도 없다. 오히려 그런 걸 의도적으로 피해온 것 같다. 상업영화의 문법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언어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감독이다.
변두리에서 찾은 진짜 이야기들
처음 그의 영화를 접한 건 2018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였다. <그림자 속의 거리>라는 작품이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첫 30분은 지루했다. 아니, 지루하다기보다는... 불편했다. 왜 이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걸까 싶었다. 주인공은 그저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고, 집에서 뉴스를 보며 맥주를 마실 뿐이었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니 그 불편함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일상에서 애써 외면하는 것들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불편함이었다. 영화 속 가족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구조적 모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들의 하루는 겉보기에 평온해 보였지만, 그 평온함 아래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이 도사리고 있었다.
최원섭 감독의 영화엔 늘 '경계'에 있는 사람들이 나온다. 정규직이 되지 못한 40대, 재개발로 쫓겨나는 할머니, 알바로 연명하는 대학생, 일자리를 찾아 서울에 온 지방 청년... 이들은 뉴스에서나 통계로만 접하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의 카메라를 통해 보면 이들이 단순한 '사회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할머니이고, 누군가의 친구라는 걸 깨닫게 된다.
특히 인상적인 건 그가 이런 인물들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동정도 아니고 비판도 아닌,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시선이다. 카메라는 판단하지 않는다. 다만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관객들은 스스로 생각하게 된다.
침묵의 힘
<불안의 하루>를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주인공이 실직 통보를 받는 장면이었다. 다른 영화라면 분노의 폭발이나 절망적인 대사로 점철했을 텐데,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날 뿐이다. "알겠습니다"라는 짧은 대답 외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침묵이 어떤 절규보다도 강렬했다. 카메라는 그의 뒷모습을 따라가며 복도를 걷는 발걸음 소리만 들려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는 동안의 침묵, 회사 건물을 나서며 뒤를 돌아보는 시선,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무거운 걸음... 그 몇 분의 장면에서 나는 한국 사회의 고용 불안정, 중년 남성의 위기, 가부장제의 모순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최 감독의 영화엔 설명하는 대사가 거의 없다. 대신 인물들의 표정, 손짓, 그리고 공간이 이야기를 한다. <숨겨진 시간의 끝>에서 남편을 잃은 여성이 빈 침대를 바라보는 장면은 단 한 마디 대사 없이도 상실의 무게를 고스란히 전달한다. 그녀는 그저 침대 끝에 앉아 있을 뿐이지만, 그 정적 속에서 우리는 상실감, 외로움, 그리고 앞으로 혼자 살아가야 한다는 막막함을 모두 느낄 수 있다.
이런 방식의 연출이 가능한 건 그가 관객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관객들이 스스로 느끼고 생각할 거라고 믿는다. 요즘 영화들이 점점 더 친절해지고, 모든 걸 설명해주려 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접근이다.
그의 카메라가 담는 공간들도 마찬가지다. 낡은 다세대주택, 을씨년스러운 사무실, 재개발을 앞둔 상가... 이런 공간들은 그 자체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림자 속의 거리>에서 주인공 가족이 사는 반지하 방은 그들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발걸음들, 비가 오면 새어드는 물, 습기로 곰팡이가 핀 벽... 이 모든 것들이 대사 없이도 이 가족의 경제적 상황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전달한다.
최원섭 감독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은 배우들이다. 대부분 낯선 얼굴들인데, 이들의 연기는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날것 그대로의 진정성을 보여준다. 사실 이건 제작비 때문이기도 하다고 들었다. 유명 배우를 쓸 돈이 없어서 연극무대에서 활동하던 배우들이나 연기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과 작업한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이게 그의 영화만의 독특한 색깔을 만들어낸다.
<그림자 속의 거리>의 주연을 맡은 김모씨는 실제로 비정규직 노동자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직장에서의 위축된 모습이나 가족 앞에서의 무력감이 연기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지인에게 들은 얘기로는, 최 감독은 촬영 전에 배우들과 몇 달간 워크숍을 한다고 한다. 대본을 외우는 게 아니라 인물의 삶을 이해하는 시간을 갖는 거라고 한다. 그래서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마치 실제 존재하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한 번은 우연히 그의 촬영 현장을 지나친 적이 있는데, 정말 조용했다. 대부분의 영화 촬영장과 달리 사람들이 크게 떠들거나 바쁘게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일상의 한 장면을 그대로 포착하려는 듯한 분위기였다.
변하지 않는 고집
요즘 독립영화들도 점점 상업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투자를 받기 위해 좀 더 자극적인 소재를 다루거나, 화제성을 위해 사회적 이슈를 표면적으로만 다루는 경우가 많다. 젊은 감독들은 SNS를 통해 자신을 알리는 데 능숙하고, 네트워킹을 통해 기회를 만들어가는 데도 적극적이다.
하지만 최원섭은 여전히 자기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최근작들을 봐도 여전히 조용하고, 여전히 불편하고, 여전히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어쩌면 이런 고집이 그를 더욱 주목받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의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하다.
그는 트렌드를 쫓지 않는다. 유행하는 소재나 기법을 따라하지도 않는다. 대신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만 한다. 그래서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일관된 세계관을 느낄 수 있다. 마치 한 사람의 소설가가 평생에 걸쳐 써내려가는 연작소설 같다.
최원섭 감독의 영화를 보고 나면 일상이 조금 다르게 보인다.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편의점 알바생, 아파트 경비아저씨... 이들 모두가 각자의 이야기를 가진 존재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그의 영화는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솔직히 그의 영화는 쉽지 않다. 재미있다고 말하기도 어렵고, 누군가에게 추천하기도 망설여진다. "영화 하나 볼까요?"라고 가볍게 시작했다가는 영화관을 나서면서 무거운 침묵에 빠지게 될 테니까. 하지만 그런 불편함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 아닐까.
그의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대부분 비슷한 경험을 한다. 영화가 끝나고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영화관을 나서서도 쉽게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 여운이 며칠, 때로는 몇 주간 지속되기도 한다. 이것이 최원섭 감독이 관객과 소통하는 방식이다.
최근 몇 년간 독립영화계도 많이 변했다. OTT 플랫폼들이 독립영화에 투자하기 시작했고, 국제영화제의 위상도 높아졌다. 하지만 최원섭은 여전히 묵묵히 자기 길을 걷고 있다. 그의 다음 작품이 언제 나올지는 모르겠다. 아마 또 작은 상영관에서, 몇 명 안 되는 관객들과 만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적은 관객들은 분명 영화가 끝나고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최원섭 감독의 영화는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 진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에 쉬운 답은 없다. 하지만 그 질문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인지도 모른다.
빠르고 자극적인 것들로 넘쳐나는 시대에, 그의 영화는 의도적으로 느리고 조용하다. 모든 것이 즉석에서 해결되기를 바라는 세상에서, 그의 영화는 쉬운 해답을 거부한다. 어쩌면 이것이 그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일지도 모른다. 멈춰서 생각할 시간, 불편해할 용기, 그리고 타인의 삶을 진정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선 말이다.
그의 카메라는 여전히 변두리를 향해 있다.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곳,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는 곳을 향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발견한 이야기들을 조용히, 그러나 강렬하게 들려준다. 화려하지도 않고 상업적이지도 않지만, 그래서 더욱 진실한 이야기들을. 그리고 그 진실함이야말로 지금 우리 시대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론
최원섭 감독의 영화는 답을 주지 않습니다. 대신 질문을 던져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에 쉬운 답은 없어요. 하지만 그 질문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인지도 모릅니다.
빠르고 자극적인 것들로 넘쳐나는 시대에, 그의 영화는 의도적으로 느리고 조용해요. 모든 것이 즉석에서 해결되기를 바라는 세상에서, 그의 영화는 쉬운 해답을 거부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그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일지도 모르겠어요. 멈춰서 생각할 시간, 불편해할 용기, 그리고 타인의 삶을 진정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선 말이에요.
최근 몇 년간 독립영화계도 많이 변했습니다. 하지만 최원섭은 여전히 묵묵히 자기 길을 걷고 있어요. 그의 다음 작품이 언제 나올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 또 작은 상영관에서, 몇 명 안 되는 관객들과 만나게 될 거예요. 하지만 그 적은 관객들은 분명 영화가 끝나고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겁니다.
그의 카메라는 여전히 변두리를 향해 있어요.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곳,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는 곳을 향해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발견한 이야기들을 조용히, 그러나 강렬하게 들려줘요. 화려하지도 않고 상업적이지도 않지만, 그래서 더욱 진실한 이야기들을요. 그리고 그 진실함이야말로 지금 우리 시대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