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닐 버거와의 첫 만남
- 광고쟁이에서 영화감독으로
- <일루셔니스트>와 확실한 각인
- <리미트리스>와 상업적 성공
- <다이버전트>와 프랜차이즈의 무게
- 여전히 진행형인 감독
닐 버거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가 기억납니다. 2006년 <일루셔니스트>를 보고 나서였는데, 그때만 해도 이 감독이 누군지 전혀 몰랐습니다. 하지만 영화 속 마술 장면들과 에드워드 노튼의 신비로운 연기가 묘하게 어우러지는 걸 보면서 '이 사람, 뭔가 다르네' 싶었습니다. 그 영화를 보고 나서 엔딩 크레딧까지 다 기다렸던 기억이 납니다. 감독 이름을 확인하고 싶어서 말이죠.
광고쟁이에서 영화감독으로
버거는 원래 예일대에서 미술을 전공했다고 합니다.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 영화감독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긴 하지만, 버거의 경우는 좀 독특했습니다. 졸업 후 바로 영화계로 뛰어든 게 아니라 광고와 뮤직비디오 쪽에서 먼저 경력을 쌓았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오히려 행운이었던 것 같습니다.
광고 만드는 사람들은 30초, 1분 안에 사람 마음을 확 잡아야 하잖습니다. 그런 훈련이 나중에 영화 연출할 때 엄청 도움이 됐을 겁니다. 특히 첫 장면부터 관객을 사로잡는 능력, 짧은 시간 안에 캐릭터의 매력을 부각시키는 기술 같은 것들 말입니다. 뮤직비디오 작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악과 영상의 조화, 리듬감 있는 편집, 강렬한 비주얼 임팩트 등을 익혔을 테니까요.
그런데 그 시절 버거의 작품들을 찾아보려고 해도 잘 안 나오더라고 합니다. 아마 당시에는 지금처럼 모든 작품이 인터넷에 남아있지 않았을 테니까 그럴 겁니다. 하지만 그 경험들이 어떤 식으로든 그의 영화에 녹아있다는 건 분명합니다.
2002년에 <Interview with the Assassin>이라는 영화로 데뷔했는데, 이게 참 기묘한 작품이었습니다. JFK 암살범이 아직 살아있다면? 이런 가정에서 시작한 가짜 다큐멘터리였는데, 보는 내내 '이게 진짜야 가짜야?' 헷갈릴 정도로 리얼했습니다. 특히 주인공 연기자의 연기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실제 암살범 인터뷰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이 영화의 촬영 기법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핸드헬드 카메라로 찍어서 마치 실제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줬거든요. 요즘에야 이런 기법이 흔하지만, 2002년 당시로는 꽤 새로웠습니다. 선댄스에서도 주목받았고, 버거라는 감독이 그냥 평범한 사람은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일루셔니스트>와 확실한 각인
하지만 역시 버거를 제대로 알린 건 <일루셔니스트>입니다. 19세기 비엔나를 배경으로 한 마술사 이야기인데, 영상미가 정말 환상적이었습니다. 특히 마술 장면들을 어떻게 찍었는지 지금도 궁금합니다. CGI 범벅이 아니라 실제로 무대에서 마술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거든요.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색감이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세피아톤에 가까운 색조를 사용했는데, 그 안에서 특정 순간들만 선명한 색깔로 강조하는 방식이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마술이 일어나는 순간,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순간,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들에서 색깔이 확 살아나면서 관객의 감정도 함께 고조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단순한 마술 영화가 아니라는 게 포인트입니다. 계급사회의 모순, 사랑과 정치, 진실과 환상 같은 주제들이 마술이라는 소재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있었습니다. 주인공 아이젠하임이 보여주는 마술이 단순한 트릭이 아니라 기득권에 대한 도전이자,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려는 절실함의 표현이었다는 점이 특히 좋았습니다.
에드워드 노튼의 연기도 일품이었지만, 제시카 비엘과 루퍼스 시웰의 연기도 인상 깊었습니다. 특히 시웰이 연기한 왕세자 캐릭터는 전형적인 악역이 될 수 있었는데, 그에게도 나름의 논리와 고뇌가 있다는 걸 보여줘서 입체적인 캐릭터로 만들어냈더라고 합니다. 버거가 그냥 볼거리만 만드는 감독이 아니라는 걸 확실히 보여준 작품이었습니다.
<리미트리스>와 상업적 성공
2011년 <리미트리스>는 솔직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브래들리 쿠퍼가 머리 좋아지는 약 먹고 인생 역전하는 이야기인데, 이런 설정 자체는 사실 흔하잖습니다. SF 소설이나 영화에서 비슷한 아이디어들을 많이 봤거든요. 그런데 버거는 이걸 진짜 재밌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약 먹고 나서 세상이 달라 보이는 장면들의 연출이 기가 막혔습니다. 색깔도 더 선명해지고, 카메라 움직임도 완전히 바뀌고요. 평소에는 둔하고 초점 없던 화면이 약을 먹는 순간 확 살아나면서 모든 디테일이 선명해지는 그 순간의 연출이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관객들이 주인공과 함께 그 경험을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버거가 보여준 또 다른 장기는 액션 시퀀스였습니다. 단순한 총격전이나 격투가 아니라, 주인공의 향상된 인지능력을 활용한 액션들이 참신했어요. 상황을 빠르게 분석하고, 상대방의 행동을 예측하고, 최적의 해결책을 찾아내는 과정을 액션으로 보여주는 방식이 독특했습니다.
브래들리 쿠퍼의 연기도 훌륭했지만, 로버트 드니로의 존재감도 무시할 수 없었어요. 드니로가 연기한 사업가 캐릭터는 단순한 조력자나 악역이 아니라, 주인공과 복잡한 관계를 맺는 인물로 그려졌거든요. 전 세계적으로 대박 났고, 버거도 A급 감독 대열에 올라섰습니다.
<다이버전트>와 프랜차이즈의 무게
2014년 <다이버전트>는 좀 아쉬웠습니다. 물론 흥행은 했지만, 뭔가 버거다운 색깔이 많이 희석된 느낌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원작 소설이 있고, 프랜차이즈 영화다 보니 제약이 많았을 겁니다. 스튜디오에서 요구하는 것들, 원작 팬들이 기대하는 것들, 전 세계 관객들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부담감 등이 겹쳤을 테니까요.
그래도 복잡한 세계관을 나름 잘 정리해서 보여줬고, 젊은 관객들한테는 확실히 어필했습니다. 특히 주인공 트리스의 성장 과정을 그리는 부분에서는 버거의 역량이 드러났어요. 단순히 액션 시퀀스만 늘어놓는 게 아니라, 캐릭터의 내적 갈등과 성장을 액션과 연결시키려고 노력한 흔적들이 보였거든요.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니, 이 영화는 버거에게 큰 스케일의 영화를 다루는 경험을 쌓게 해준 작품이었던 것 같습니다. 수백 명의 스태프, 거대한 세트, 복잡한 액션 시퀀스들을 조율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었을 테니까요.
여전히 진행형인 감독
버거의 좋은 점은 한 장르에 안주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독립영화로 시작해서 로맨스, SF, 액션까지 다 해봤고, 최근에는 다시 심리 스릴러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2023년 <The Marsh King's Daughter>도 그런 시도 중 하나였는데, 여전히 사람 심리를 파고드는 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이 영화는 데이지 리들리가 주연을 맡았는데, 아버지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다루는 이야기였어요. 스타워즈의 레이로만 알고 있던 리들리의 다른 면을 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습니다. 버거는 배우들의 새로운 면을 끌어내는 능력도 뛰어난 것 같아요.
그리고 대부분 시나리오에도 직접 참여한다는 점도 인상적입니다. 요즘 할리우드 감독들은 보통 완성된 스크립트 받아서 연출만 하는 경우가 많은데, 버거는 이야기 단계부터 깊이 관여합니다. 그래서 그의 영화들을 보면 연출과 스토리가 따로 노는 느낌이 없어요. 모든 장면, 모든 대사가 전체적인 맥락 안에서 의미를 갖는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최근 몇 년간은 상대적으로 조용했지만, 여러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들이 들리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가 다시 <일루셔니스트> 같은 작품을 만들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물론 똑같은 영화를 만들라는 건 아니고, 그때처럼 예술성과 대중성을 모두 잡는 작품 말입니다.
마무리하며
닐 버거는 그냥 재능 있는 감독이 아니라, 자기만의 철학을 가진 사람인 것 같습니다. 대중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그 안에 뭔가 생각할 거리를 숨겨놓는 스타일이 특히 좋습니다. 요즘처럼 자극적인 것만 추구하는 시대에, 이런 감독이 계속 활동하고 있다는 게 고맙습니다.
그의 영화들을 보면 항상 '진짜와 가짜', '현실과 환상' 같은 주제들이 등장하는 것 같아요. <Interview with the Assassin>의 진실 여부, <일루셔니스트>의 마술과 현실, <리미트리스>의 향상된 인식과 일상적 현실 등등. 이런 주제 의식이 일관되게 유지되면서도 각각의 영화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풀어낸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다음에는 어떤 영화를 만들지 기대가 됩니다. 아마 또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놀라게 해줄 것 같습니다. 그의 다음 작품이 언제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기다려볼 만한 가치가 있는 감독이라고 생각합니다.